Sunday, September 13, 2020

덕구 생각 : 르 코르뷔지에 철학을 담은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리고 마포아파트

< 덕구 생각 : 르 코르뷔지에 철학을 담은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리고 마포아파트 >
1962년에 한국의 첫번째 시도인 마포아파트가 준공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모델로 삼아 서울의 대규모 주택을 짓는 새로운 시도가 해를 거듭하며 발전하고 규모가 커져서 대한민국을 아파트공화국으로 재건설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한국형 아파트건축의 기준모델을 설계한 사람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입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그의 인간중심 건축철학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거주할 곳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파리 주변부로 밀려난 서민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 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 대규모 공동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이었습니다.
한국의 1960대 상황에서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가 당시에 꼭 필요한 건축모델을 제공한 셈이죠. 그가 만든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이었고 ‘소유가 아닌 주거’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파트에 담은 철학은 간 곳 없고 우리나라를 뒤덮은 아파트는 주거가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변질된 채 서민을 괴롭히는 괴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요. 모양과 건축설계만 흉내 냈을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설계철학은 배우지 못한 것인가요.
르 코르뷔지에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살던 집은 프랑스 카프마라탱 해변에 있는 170 sf (약 4평) 크기의 작은 통나무집이었습니다. 그가 여름용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모듈러 이론을 적용 설계해서 지은 이 집은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만치 편하고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를 설계한 르 코르뷔지에 자신은 이 작은 집을 사랑했고, 78세의 나이로 이 작은 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주거 공간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나 자신에게 반문해봅니다.

P.S.
조사해보니 한국 최초 아파트였던 마포아파트는 1994년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고 합니다.
마포아파트보다 10년 앞서 지어진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원래의 모습대로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구수와 용적율을 극대화하는 한국형 아파트와는 다르게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기둥을 바쳐서 건물의 1층을 비워놓고 이곳에 다용도 시설을 조성했으며, 옥상에 공원, 유치원, 수영장과 산책로 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국형 아파트가 높은 담장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우리만의 성을 쌓을 때, 유니테 다비타시옹 건축은 녹지와 열린 공간을 모두를 위해 개방합니다.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 즉 용적율을 최소화한 결과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초록과 공원 속의 아름다운 ‘집들’이 되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꾸었던 것은 건물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건축이고 사람을 위한 도시입니다.
9/13/2020




Tuesday, September 1, 2020

덕구 생각 : 차별금지법 그리고 성경의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 차별금지법 그리고 성경의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

경의 요한복음 8장에 다음과 같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예수님의 얘기가 나옵니다. 

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중략) 

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중략)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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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몇가지 전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저는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둘째, 저는 남자끼리 성적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면 설레기는 커녕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이성애자인거죠.

선 차별금지법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뿐 아니라 장애인, 외국인, 내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미혼모, 싱글맘, 출신지역, 전과, 나이, 비정규직, 남여 등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법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 차별금지법의 수많은 대상자 안에 성적지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국가로서는 차별당하거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든 대상을 법의 테두리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세한 사항에 대한 논쟁이나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또는 법의 적용 영역 등에 대해서 따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해답을 이미 2000년 전에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죄를 지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도 용서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신 죄인을 우리는 21세기에 정죄하려는 것 아닙니까?

둘째,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저는 들립니다.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런데, 너도 그에 못지않은 죄를 매일 짖고 살아가지 않느냐? 그리고 나도 이 여인을 용서하는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이 여인을 정죄하느냐? 

시 동성애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함으로써 나의 죄는 덜 심각해보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검은색과 비교하면 나의 까만색은 하얗게 보인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약의 율법에 따라 나의 죄를 따져 묻는다면 나는 이미 눈도 뽑히고, 팔도 잘리고, 다리도 잃었을 것이며, 아마도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있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나 매일 죄 속에서 살아가는 저를 용서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날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신은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다를까요? 

시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것을 허용해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같은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조차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차별하기까지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까지 말씀하신 용서와 사랑의 복음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어쩌면 바로 그런 사람때문에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국에서의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범기독교계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정치적인 행동까지 펼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도 같은 문제의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신념으로 유도하고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별금지법의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4가지 영역은 (가)고용, (나)재화·용역, (다)교육·직업훈련, (라)행정·사법절차 및 서비스의 영역에서 차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리고 차별금지사유는 총 23가지로 (1)성별 (2)장애 (3)나이 (4)언어 (5)출신국가 (6)출신민족 (7)인종 (8)국적 (9)피부색 (10)출신지역 (11)용모 등 신체조건 (12)혼인여부 (13)임신 또는 출산 (14)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15)종교 (16)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17)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18)성적지향 (19)성별정체성 (20)학력(學歷) (21)고용형태 (22)병력 또는 건강상태 (23)사회적신분입니다.

근의 한국 일부 기독교인들의 이상한 행동과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위의 한가지 원인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과 다른 의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단체의 의견이 모든 기독교인의 의견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위의 글을 씁니다. 

9/1/2010



덕구 생각 : 명예와 권위에 따르는 의무 - 노블레스 오블리제

 < 명예와 권위에 따르는 의무 >

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표현을 종종 보게됩니다. 주로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부를 하거나 좋은 일에 동참했거나 하면 그를 칭찬하는 말이지요. Noblesse 의 원래 뜻은 '닭의 벼슬'이고 'Oblige' 는 '달걀의 노른자'를 의미한답니다. 직역하자면 닭의 본분은 자신의 벼슬이 멋있다고 자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알을 낳는 것이야말로 꼭 해야하는 본질이라는 것이죠. 

근 한국에서 또 미국에서의 개인주의적 또 집단주의적 성향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온갖 억지를 부리고,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말을 창피하지 않은지 해댑니다. 또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소란을 피우고 질서를 헤치며 폭력으로 남을 겁주는것을 정당화 시킵니다. 상식과 정의 그리고 양심 (신앙적 양심 포함) 은 잊은지 오래고, 관심조차 없는듯 보입니다.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이른바 밥그릇 싸움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보다도 내가 돈을 더 벌겠다 또는 내 그릇에 숫가락 더 얹으려는 놈은 미리 손을 보겠다. 저에게만 이런 심사로 비쳐지는걸까요. 

블레스 오블리제! 달걀을 낳지 못하는 닭은 필요 없습니다. 폐기처분 하든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겠죠. 닭의 벼슬만 모아가지고 뭘 할수 있을까요? 친구 주방장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닭벼슬 요리 맛있게 할수 있는지요. 

블레스 오블리제와 관련하여 이런 역사가 있습니다.  백년전쟁때 프랑스의 칼레라는 도시가 영국에 포위당하고 저항하다가, 영국군에 항복합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에 자비를 베풀어 시민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에 그동안의 반항에 책임을 물어 6명을 처형하겠다고 말합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Eustache de St Pierre 가 처형당하겠다고 앞에 나섰고, 이어서 상인, 법률가, 귀족 들이 앞으로 나옵니다. 여섯명이 다음날 처형당하기 위해 교수대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임신중이던 왕비의 간청에 따라 왕은 여섯명의 희생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생명을 내놓겠다고 자원했던 여섯명 모두를 살려줍니다. 이 역사적 사실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적 예화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의 예화는 좋은 결말에 이르렀고, 그래서 아름다운 예화로 남았지만,  현실에서는 처참한 운명을 맞이한 기록되지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제 스토리가 있을것입니다. 또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결말을 보게될지 궁굼합니다. 나도 같은 상황에서 Eustache de St Pierre 처럼 앞에 나설수 있는지 물어볼까봐 두렵습니다. 

8/31/2020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일부 소매점들은 판자로 창을 가리고, 백악관도 뭐가 두려운지 Barricade 를 높게 쳐야하는 처지입니다.  새로 선출이 되든 재선이 되든, 미국의 대통령께서는 B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