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November 3, 2020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일부 소매점들은 판자로 창을 가리고, 백악관도 뭐가 두려운지 Barricade 를 높게 쳐야하는 처지입니다. 

새로 선출이 되든 재선이 되든, 미국의 대통령께서는 Barricade 를 허물고 서로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우선으로 정책을 펼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서의 구절이 떠오릅니다 에베소서2:14  :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

그런데, 더욱 우려되는 것은 요사이 종교의 담론과 주장이 담을 헐고 화해시키기는 커녕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고 미워하며 담을 더욱 높게 쌓도록 부추기는 역할만을 하는 것은 아닌지요.   



Sunday, September 13, 2020

덕구 생각 : 르 코르뷔지에 철학을 담은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리고 마포아파트

< 덕구 생각 : 르 코르뷔지에 철학을 담은 유니테 다비타시옹 그리고 마포아파트 >
1962년에 한국의 첫번째 시도인 마포아파트가 준공되었습니다. 프랑스의 유니테 다비타시옹을 모델로 삼아 서울의 대규모 주택을 짓는 새로운 시도가 해를 거듭하며 발전하고 규모가 커져서 대한민국을 아파트공화국으로 재건설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한국형 아파트건축의 기준모델을 설계한 사람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입니다.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그의 인간중심 건축철학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고 평가받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거주할 곳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파리 주변부로 밀려난 서민들의 삶은 비참했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 들에게 집을 마련해주기 위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 대규모 공동주택 유니테 다비타시옹이었습니다.
한국의 1960대 상황에서 어쩌면 르 코르뷔지에가 당시에 꼭 필요한 건축모델을 제공한 셈이죠. 그가 만든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이었고 ‘소유가 아닌 주거’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파트에 담은 철학은 간 곳 없고 우리나라를 뒤덮은 아파트는 주거가 아닌 투기의 대상으로 변질된 채 서민을 괴롭히는 괴물로 변해버린 것은 아닌가요. 모양과 건축설계만 흉내 냈을 뿐 그 안에 들어 있는 설계철학은 배우지 못한 것인가요.
르 코르뷔지에 그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살던 집은 프랑스 카프마라탱 해변에 있는 170 sf (약 4평) 크기의 작은 통나무집이었습니다. 그가 여름용 거처로 사용하기 위해 모듈러 이론을 적용 설계해서 지은 이 집은 작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만치 편하고 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대규모 공동주택 단지를 설계한 르 코르뷔지에 자신은 이 작은 집을 사랑했고, 78세의 나이로 이 작은 집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주거 공간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 나 자신에게 반문해봅니다.

P.S.
조사해보니 한국 최초 아파트였던 마포아파트는 1994년 마포삼성아파트로 재건축되었다고 합니다.
마포아파트보다 10년 앞서 지어진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원래의 모습대로 유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습니다. 가구수와 용적율을 극대화하는 한국형 아파트와는 다르게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기둥을 바쳐서 건물의 1층을 비워놓고 이곳에 다용도 시설을 조성했으며, 옥상에 공원, 유치원, 수영장과 산책로 등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국형 아파트가 높은 담장으로 그곳에 거주하는 우리만의 성을 쌓을 때, 유니테 다비타시옹 건축은 녹지와 열린 공간을 모두를 위해 개방합니다. 건물이 차지하는 면적 즉 용적율을 최소화한 결과 유니테 다비타시옹은 초록과 공원 속의 아름다운 ‘집들’이 되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꾸었던 것은 건물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사람을 위한 건축이고 사람을 위한 도시입니다.
9/13/2020




Tuesday, September 1, 2020

덕구 생각 : 차별금지법 그리고 성경의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 차별금지법 그리고 성경의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

경의 요한복음 8장에 다음과 같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예수님의 얘기가 나옵니다. 

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중략) 

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중략)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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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몇가지 전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저는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둘째, 저는 남자끼리 성적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면 설레기는 커녕 혐오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이성애자인거죠.

선 차별금지법은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살아가고 있는 성소수자뿐 아니라 장애인, 외국인, 내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미혼모, 싱글맘, 출신지역, 전과, 나이, 비정규직, 남여 등의 인권을 보호하고 차별을 금지하기 위한 법으로 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어쩌다 그 차별금지법의 수많은 대상자 안에 성적지향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국가로서는 차별당하거나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모든 대상을 법의 테두리에 포함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세한 사항에 대한 논쟁이나 차별금지법을 제대로 이해하느냐 또는 법의 적용 영역 등에 대해서 따지지 않더라도,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해답을 이미 2000년 전에 제시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죄를 지은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예수님께서도 용서하시고 정죄하지 않으신 죄인을 우리는 21세기에 정죄하려는 것 아닙니까?

둘째,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저는 들립니다. 동성애는 죄가 맞다. 그런데, 너도 그에 못지않은 죄를 매일 짖고 살아가지 않느냐? 그리고 나도 이 여인을 용서하는데 너는 무슨 자격으로 이 여인을 정죄하느냐? 

시 동성애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정죄함으로써 나의 죄는 덜 심각해보이고, 더 나아가 그들의 검은색과 비교하면 나의 까만색은 하얗게 보인다고 근거 없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약의 율법에 따라 나의 죄를 따져 묻는다면 나는 이미 눈도 뽑히고, 팔도 잘리고, 다리도 잃었을 것이며, 아마도 오늘까지 목숨이 붙어있지도 못할 겁니다. 그러나 매일 죄 속에서 살아가는 저를 용서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새로운 날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신은 그리고 동성애자들은 다를까요? 

시 저와 다른 의견을 가지신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도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고 그것을 허용해야 된다고 말씀드립니다. 같은 기독교 울타리 안에서 조차 자신의 종교적 신념과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차별하기까지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까지 말씀하신 용서와 사랑의 복음의 가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어쩌면 바로 그런 사람때문에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국에서의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범기독교계가 조직적으로 반대하고 정치적인 행동까지 펼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미국에서도 같은 문제의 종교적 신념을 정치적 신념으로 유도하고 이용하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별금지법의 내용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우선 4가지 영역은 (가)고용, (나)재화·용역, (다)교육·직업훈련, (라)행정·사법절차 및 서비스의 영역에서 차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리고 차별금지사유는 총 23가지로 (1)성별 (2)장애 (3)나이 (4)언어 (5)출신국가 (6)출신민족 (7)인종 (8)국적 (9)피부색 (10)출신지역 (11)용모 등 신체조건 (12)혼인여부 (13)임신 또는 출산 (14)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 (15)종교 (16)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17)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18)성적지향 (19)성별정체성 (20)학력(學歷) (21)고용형태 (22)병력 또는 건강상태 (23)사회적신분입니다.

근의 한국 일부 기독교인들의 이상한 행동과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행위의 한가지 원인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란과 다른 의견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단체의 의견이 모든 기독교인의 의견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위의 글을 씁니다. 

9/1/2010



덕구 생각 : 명예와 권위에 따르는 의무 - 노블레스 오블리제

 < 명예와 권위에 따르는 의무 >

블레스 오블리제라는 표현을 종종 보게됩니다. 주로 부자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기부를 하거나 좋은 일에 동참했거나 하면 그를 칭찬하는 말이지요. Noblesse 의 원래 뜻은 '닭의 벼슬'이고 'Oblige' 는 '달걀의 노른자'를 의미한답니다. 직역하자면 닭의 본분은 자신의 벼슬이 멋있다고 자랑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알을 낳는 것이야말로 꼭 해야하는 본질이라는 것이죠. 

근 한국에서 또 미국에서의 개인주의적 또 집단주의적 성향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봅니다.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온갖 억지를 부리고,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말을 창피하지 않은지 해댑니다. 또 집단이라는 이름으로 소란을 피우고 질서를 헤치며 폭력으로 남을 겁주는것을 정당화 시킵니다. 상식과 정의 그리고 양심 (신앙적 양심 포함) 은 잊은지 오래고, 관심조차 없는듯 보입니다.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결국 이른바 밥그릇 싸움으로 해석됩니다. 누구보다도 내가 돈을 더 벌겠다 또는 내 그릇에 숫가락 더 얹으려는 놈은 미리 손을 보겠다. 저에게만 이런 심사로 비쳐지는걸까요. 

블레스 오블리제! 달걀을 낳지 못하는 닭은 필요 없습니다. 폐기처분 하든 아니면 다른 용도로 사용해야겠죠. 닭의 벼슬만 모아가지고 뭘 할수 있을까요? 친구 주방장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닭벼슬 요리 맛있게 할수 있는지요. 

블레스 오블리제와 관련하여 이런 역사가 있습니다.  백년전쟁때 프랑스의 칼레라는 도시가 영국에 포위당하고 저항하다가, 영국군에 항복합니다.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칼레에 자비를 베풀어 시민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대신에 그동안의 반항에 책임을 물어 6명을 처형하겠다고 말합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Eustache de St Pierre 가 처형당하겠다고 앞에 나섰고, 이어서 상인, 법률가, 귀족 들이 앞으로 나옵니다. 여섯명이 다음날 처형당하기 위해 교수대 앞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임신중이던 왕비의 간청에 따라 왕은 여섯명의 희생정신을 높게 평가하고 생명을 내놓겠다고 자원했던 여섯명 모두를 살려줍니다. 이 역사적 사실이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상징적 예화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의 예화는 좋은 결말에 이르렀고, 그래서 아름다운 예화로 남았지만,  현실에서는 처참한 운명을 맞이한 기록되지 않은 노블레스 오블리제 스토리가 있을것입니다. 또 오늘날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결말을 보게될지 궁굼합니다. 나도 같은 상황에서 Eustache de St Pierre 처럼 앞에 나설수 있는지 물어볼까봐 두렵습니다. 

8/31/2020


Sunday, August 30, 2020

덕구 생각 : 목사는 하나님의 종인가?

오늘아침 글에 대해서 어떤 분이 기름부음 받은 주의 종에 대해서 항의성 글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의 또 다른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목사는 하나님의 종인가? >>

흔히 목사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고, 목사님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고 오늘날에도 목사님의 말씀에 절대 토를 달아서는 안된다는 얘기를 듣습니다성경적으로 옳은 말일까요?

신약시대와 구약시대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 대한 대상을 혼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들은 왕, 선지자, 제사장 들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 만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고, 예수님 이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메시아로서의 역할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떤 분께는 충격적일지 모르지만, 성경에 목사라는 직분이 나와있지 않습니다. 지금 성경앱을 띄어서 돗보기 창에 목사라고 쳐보세요. 딱 한번 나옵니다.

에베소서 4:11 –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성경학자들에 의하면 에베소서 411절의 직분에 대한 설명에 나오는 목사는 헬라어 포이멘의 의도적 (또는 실수적) 오역이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목자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참조로 가톨릭 공동번역도 목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는 장로의 직분이 설명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장로를 특별히 목사로 호칭하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 개혁의 요점을 표현하는 다섯 솔라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 안에도 제사장 또는 목사에 관한 표현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은 로마가톨릭을 통해서 교황권으로 가지고 있던 폐습을 개혁하고 만인제사장 교리를 통해서 기독교를 계급주의가 아닌 만인평등사상 즉 하나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는 신학적 개념으로 발전시킨 역사적 사건입니다.

요약하자면 신약시대에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고 그 안에 높고 낮음의 지위의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특히 장로교회에서는) 장로들 중에서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즉 설교하는 은사를 받은 또는 신학교 교육을 통해서 교육을 받은 장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이 모두 신학교를 다니고 훈련받을 형편이 안되니, 신학교 교육을 통해서 교육받은 즉 객관적으로 능력이 있다고 평가되는 사람을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설교하는 전문인으로 고용한 것입니다.

목사님께 무례하게 대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님의 말씀도 절대적이 아니며 목사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경배의 대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해 없기를 …..

저와 생각이 다른 분께는 또 불편한 메시지가 되겠네요.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꾸뻑

P.S.: (첨언) 아시죠? 목사님들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고, 자신을 우상화하고 옳지 않은 말과 행동으로 신앙인들을 속여먹는 나쁜 일부 사람들에 대한 지적입니다. 어렵게 작은 교회에서 봉사하시고 신앙의 본질을 지키기위해서 노력하시는 많은 목사님들 존경합니다. 

 


덕구 생각 : '사랑'이란? 그리고 '네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 8월30일 주일아침에 >>

'신앙을 생명같이 여기는 이들에게는 종교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다'

어느 개신교단체 대표목사가 주일 대면예배를 주장하며 했던 말이랍니다.

기독교인에게 이것은 당연히 맞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주일 대면예배를 꼭 하겠다고 주장하기위해서 이런 표현을 했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는 '대면예배'가 아니라 '신앙'을 생명같이 여기는 것이고, '대면예배'가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1. 이것을 얘기한 목사님이 '신앙=대면예배' 또는 '종교의 자유 = 대면예배'라고 동일시한 것이라면 예배라는 행위만을 신앙의 전부로 간주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2. 예배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에서 전염을 최소화하기위해 온라인예배 등으로 대신하려는 것은 매우 상식적인 일입니다. 

3. 혹시 그렇게 예기한 목사님께서 예배라는 행위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표현하기위해 주일 대면예배를 강행하고 출석하는 교인들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목사이기에 앞서 양심이 있는 인간인가 의심스럽습니다. 

< 네 이웃은 누구인가? >

우연히도 최근에 많이 거론되는 교회들의 이름에 '사랑'이라는 글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대해서도 딴지를 걸어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사랑'이라는 단어만큼 오용되는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인의 사랑은 또는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우리교회 또는 끼리끼리 공동체 안에서 우리끼리 얼싸안고 짝짝꿍하고 눈물흘리는 것만이 사랑의 전부라고 착각하는것은 아닌지요?

공동체 밖의 사람들과 공공의 안전을 해치면서까지 끼리끼리의 즐거움과 행복만을 추구하는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하시나요? 집단 이기주의의 왜곡된 표현은 아닐까요? 

최근의 사태들을 목격하면서 누군가 이런 표현을 하더군요.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배웠는데, 요새 보니 그게 아니라 '남을 이용해먹는것'이 사랑의 반대 개념인것 같다고요. 

주일 아침에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과 '네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먹먹하게 바라봅니다. 

성경의 사마리아인 상황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제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봅니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내 역할은 누구였을까


근데, 진짜 진짜 예전과 같이 당신과 함께 재잘거리고, 깔깔거리고 박수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빨리 그런 날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8/30/2020



Thursday, August 27, 2020

코로나19 정보 : 코로나 블루 극복 - 마음 영양제

<< 코로나 블루 극복 - 마음 영양제 >>

어제 멀리 있는 친구가 그랬어요. 코로나로 힘들고 지쳐간다고요. 그리고 너무나도 우울하다고 …..  그래서 찾아보니 재미있는 영양제가 있어서 공유합니다.

친구야, 우리 같이 서로서로 응원하며 어려운 시기를 견디어 내자!

코로나 블루 극복을 위한 마음영양제 자기공감 Self-Compassion 실천해보세요. ( 서울시COVID19심리지원단 자료 참조 )

< 1.자신에게 말해주기 전반부 30 >

모두가 힘든 시간이야

우리는 지금 힘들고, 상처받고 있어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린 혼자가 아니고, 해야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주변의 모두가 함께 이겨내려고 애쓰고 있어

지금 제일 중요한 하나는 자신을 돌보는 거야

< 2. 자기 공감 행동 30 >

(여기서부터는 행동도 함께합니다)

마음이 가슴 속에 있다고 생각하고 당신의 가슴을 손으로 포개면서, 가슴 마음을 꺼내어 당신의 손위에 살포시 얹어주세요.

마음을 손으로 감싸주고, 지친 마음을 온기를 불어넣어 따뜻하게 해주고, 보듬어 주시고 쓰다듬어주세요.

< 3. 자신에게 말해주기 후반부 30 >

그리고 나에게 말해줍니다.

“나부터 나에게 잘해주자.

“내게 필요한 것을 나에게 해주자.

스스로 문장을 만들어 자신에게 말해주세요. (아래 )

받아들이자

용서하자

강해지자

참아내자

사랑하며 살아가자

** 사랑하는 친구나 다른 가족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꺼내서 주셔도 됩니다.

정리 : 이덕구  8/27/2020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덕구 생각 (미국 생활): 어느 편의 후보가 대통령이 되든, 걱정되는 상황입니다.  일부 소매점들은 판자로 창을 가리고, 백악관도 뭐가 두려운지 Barricade 를 높게 쳐야하는 처지입니다.  새로 선출이 되든 재선이 되든, 미국의 대통령께서는 Ba...